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5) - 훈장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6148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2.08.22. 12: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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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ami 베르나르 앙또니오즈 (5) -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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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6

나는 베르나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우리 한국대사관측에 알리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났다.

한국과 프랑스 두나라 사이, 그가 살아있는 동안 양국 사이의 미술교류에 특별히 이바지한 공로자로서 우리나라 정부가1980년도 중반, 앙또니오즈에게 주불대사관을 통하여 문화훈장을 수여 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대사관측에서 알면 반드시 조의를 표할 것이다.

그리고 앙또니오즈의 공로를 조문객을 보내서 한국정부가 잊지않고 조의를 표하면 한불 양국간 미술문화교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문화계 인사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 줄 것이다.

프랑스에 체재하며 활동하는 한국미술가들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한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일찌기 깊어진 베르나르는 1970년초부터 한국의 현대미술을 유치해 파리의 여러전시장에서 전시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전시는 파리시청 부근, 프랑스를 거처가는 세계 각국 예술가들에게 단기간 작업실을 제공하고 있는 씨떼 엥떼르나쇼날르 데자르의 본관 지하전시실에서 약소하게 열였다.

그런 다음엔 샹제리제에 면해있는 특별기획 전시장소로 유명한 그랑빨레에서 크게 열었고, 그후엔 뽕삐두 국립현대미술관이 생기기 전까지 프랑스 현존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개하던 메종 데자띠스트 전시장에서 개최해서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프랑스 화단에 단계적으로 소개했다.

그러는 한편, 서울에서도 프랑스측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개최함으로서 두나라 작가들의 작품교류전을 적극적으로 자주 주선해 나갔다.

그뿐만아니라, 1980년대에 와서는 프랑스 명화전이 서울에서 개최되도록 했으며 해외전시회에 잘 빌려 주지 않는 밀레가 그린 세계적인 작품 앙젤뤼스(만종)도 서울에 가져다 전시하여 한국의 애호가들을 기쁘게 했다.

프랑스 명화와 밀레의 만종같은 서양화가 한국에서 전시된 것은 처음 있었던 일로 우리나라사람들이 국내에 앉아서 서양화 원작들을 직접 감상하는 시대가 비로서 열린 것이다.

한국미술가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생각에 있던 앙또니오즈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미술가들에게도 프랑스 문화성이 배정하는 미술가 작업실인 아뜰리에를 제공했고 한국미술가들의 작품이 프랑스 정부와 미술관에 소장되도록 했다.

그런 연유로 해서 한국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한 우리나라 정부가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대사관측에서 조문을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즈느비에브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내가 잘 아는 파리 한국문화원장에게 알리려고 전화를 걸었다.

최근에 새로 부임한 문화원장 C씨는 당시의 파리 한국대사관 외교관중에서 앙또니오즈의 문화성시절에 쌓은 드높은 업적과 한국미술가들을 도운 공로등에 대하여 잘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관료였다.

C씨는 1970년대부터 주불 한국대사관에 공보관으로 두번이나 근무를 한데다가, 이번 프랑스로의 부임이 세번째이며 더구나 이번엔 문화원장으로 부임해 왔기때문에 그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성 싶었다.

나는C원장에게 오늘 아침, 앙또니오즈가 급자기 사망한 소식을 전하면서 지금 여름 휴가철이라서 장례식은 따로 없이 가족들끼리만 모여서 조용히 치룬다고 한다, 그러나 장례식 대신 조문객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추도미사를 9월 첫 일요일에 성당에서 올린다고하니 그때 대사관측이 조문을 위해서 참석한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C원장은 대사관에 출근하는데로 주불 한국대사와 조문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겠노라 했다.

1994년 7월 14일에 앙또니오즈가 사망했다는 부음을 알리는 부고장을 겸하여 고인을 위한 추도미사를 9월 첫 일요일, 쌩작끄 뒤오빠 성당에서 올린다는 내용의 초청장이 집에 도착 됐다. 한국대사관에서도 한국문화원에서도 그 초청장을 우편으로 받았을 것이다.

베르나르집에서 가까운 쌩작끄 뒤오빠 성당은고불렝 관사로부터 이사해 온 후부터 노부부가 늘 다니던 성당이었다.

미망인 즈느비에브는 미셀, 프랑스아 마리, 필립 세 아들과 막내 딸 이자벨과 함께 성당 제단앞 맨앞자리에 앉았고, 그옆으로 베르나르의 동기(同氣)간들이 앉았다. 베르나르는 베르나르가 늘 자랑한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형 삐에르와 누나 마리, 여동생 라파엘을 동기간으로 두었다.

그외의 가족들, 친지들, 친분이 두텁던 미술가들 그리고 문화성의 관리들, 베리에 옛 사무실 동료들 그리고 드골파 정치인들이 성당에 만장한 가운데 고인의 명복을 비는 미사는 조용히 진행됐다.

그랬지만 어찌된 일인지 프로토콜을 매우 따지기 좋아 하는 우리나라 대사관측 외교관은 아무도 참석을 않했을 뿐더러 C문화원장 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화가들도 몇 작가만이 참석했을 뿐이어서 내마음은 그날 그지없이 허전했다.

조용히 미사가 끝나자 조문객들은 서둘음 없이 미망인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고 방명록에 애도의 글을 남기면서 성당을 떠났다.

파리 한국문화원에 갓 부임한 C원장과 나는 파리에서 1971년 가을쯤에 처음 만났지만 중고등학교 선후배 관계로 해서 점차 서로 잘 아는 사이같이 발전했다.

문화원에 부임한 C원장은 뾰죽히 의논할 일도 없었으면서도 툭하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그때 파리에서 일하지 않고 시골 화실에서 일할 때여서 파리에 올라가서 그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얘기 저얘기를 전화로 C원장과 몇번 한끝에 언젠가 한번은, 문화원 개원이후 이제까지의 문화원 행사를 열람해보았다며 오래된 재불화가들 중에서 유독 오천룡만이 문화원에서 개인전을 하지 않은 화가라면서 개인전을 한번 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제안은 다름이 아니고 자기가 문화원장으로 있는 동안에 개인전을 문화원에서 개최해 보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내게 주는 특별한 선심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우리 문화원에서 개인전을 한번도 열지 않은 작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전을 문화원에서 갖고 싶지 않은 점이 있기때문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화원장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파리문화원은 1980년에 개원됐는데, 우리나라가 파리에 다른나라의 문화원이 별로 없을 때 한국문화원을 과감히 설립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원초, 어느 작가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을때, 문화원이 작가에게 도움을 줄 만한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작가가 했고 그 불평이 급기야 소란스럽게 됐었다.

그것은 문화원이 작가의 전시를 성공시키기위해서 어떻게 도와야 할 운영방침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과 설사 운영방침이 확고했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예산을 정부로부터 받고 있지 못하는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화속의 C원장은 새로 취임해 온 문화원장으로서 파리에서 오래동안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 중에서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회를 열어 보고 싶으면서 나를 지목하니 우선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내전시회 보다도 이왕이면 아주 의미있는 전시회를 문화원에서 한번 개최해 보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면서 그의 제안을 슬며시 거절했다.

C원장은 나의 뜻에 의아해 하면서 의미있는 전람회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미있는 전시회란 앙또니오즈에게 은혜를 입은 재불 한국작가들의 작품전시회로 작년에 작고한 ≪ 베르나르 앙또니오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 ≫를 문화원이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앙또니오즈의 추도미사에 한국 대사관측에서 참석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분에 대한 관심이 이젠 싹 없어졌다고 여겨지지만 앙또니오즈와 친분을 두텁게 했고 도움을 받은 재불 한국작가들의 작품전을 문화원이 개최하고 앙또니오즈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전시회가 아주 의미있는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혔다.

거기까지 듣던C원장은 펄쩍 뛰면서 우리 문화원에 무슨 예산이 있어서 그런 전시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전화를 딱 끊어 버렸다.

예산이 애초부터 그렇게 없다니 명색만 있는 한국문화원인 셈인데 다시말하면 예산이 안드는 전시회만을 골라서 해보자는 심산인 모양이어서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해 볼 필요가 없기도 했었다.

그렇게 예산을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전시회만을 찾는다면 아까 나에게 생색을 내면서 나의 개인전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니 갑자기 입안이 씁쓸해 졌다.

예산이 없다고 짜증스럽게 말하던C원장은 무슨 마음에서 인지 그후에도 전화를 또 해서는 다음 시즌 전시회 계획 일정표를 지금 작성중인데 문화원에서 개인전을 정말 열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내 전시회는 하고 싶지 않으니 앙또니오즈 추모전을 공들여서 한번 열어보라고 다그치듯 말했고 C원장은 그말을 매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앙또니오즈가 돌아가신지 3년째이고 C원장이 부임해 온지도 3년째가 된1997년 1월 중순쯤, C원장의 전화소리로 여겨지는 전화가 또 다시 요란히 울렸다.

그전화는 앙또니오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전람회를 금년가을에 열겠다고 하면서 그준비와 진행을 위해 도와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하는 전화였다.

나는 앙또니오즈가 돌아간 후부터 그를 생각해야 할 재불한국미술가들이 앙또니오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람회를 언젠가가 되든 꼭 한번 열어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귀가 번쩍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문화원에 가서 문화원장과 마주 앉아 전시회를 의논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나를 자기 사무실에 맞아들인 C원장은 금년말이면 마지막 임기를 채우고 떠나게 될 것인데 떠나기전에, 그 의미있는 전시회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추진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앙또니오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전을 개최하기 위한 준비에 모든 협조를 적극적으로 하겠는데 먼저 한가지 들어줘야 할 조그만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을 문화원장이 받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화원장은 정색을 하면서 조건은 또 무슨 조건 하면서 그 조건을 듣고자 했다.

나는 파리로 C원장을 만나러 차를 운전하면서, 오늘 의논할때 덧붙혀 말해 보리라고 작정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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