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리스트에 대하여 (1)
작성자 오천룡 조회수 5179 건
홈페이지 http://ohchunryong.com 작성일 2011.12.26. 22: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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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02-11-18
S 형에게,

오렌동안 제작해오던 ‘나무잎 시리즈’를 멈추고 새로 시작한 그림의 화풍을 인터넷에 선보인 최신작 풍경화 두점을 보시고 ‘칼라리스트라는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칼라리스트(Colorist)인가’하는 질문을 던져주신데 대한 답을 적어 보렵니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나의 색채사용에 대해 피력해 보고 싶었던 참 이었는데 이번에 나의 색채의 출처가 어디였는가의 역사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칼라리스트는 색채화가를 지칭하는 것이니 정확히 말하면 ‘주된 표현수단을 색채에 의존하려는 화가’를 일컫는 단어 이겠습니다.

이 지칭은 피에르 보나르와 앙리 마티스에게 처음으로 붙혀졌지요. 물체의 그림자에도 색채가 있다고 본 인상파화가들에서는 아직 이런 지칭을 받은 화가가 없었으나 보나르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현란한 색채를 구사하기 시작한 야수파화가들에게 붙혀졌습니다.

나는 색채화가란 말 듣기를 좋아해서 내가 색채화가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색감쓰기를 여러모로 좋아 하니까요.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물의 고유색에 대해 연구하면서 자연광선 아래에서는그 고유색들이 빛을 받는 순간마다 다르게 보여진다고 재해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색채사용이 인상파 화가들에게 훨씬 자유로워 졌습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선생들에 의해 제자들의 색채사용이 철저히 제한돼 있었습니다. 내가 중학생일때에도만해도 수채화 빠렛뜨에는 검은색과 흰색은 아예 짜 놓지 못하게 했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을 섞으면 색이 탁해진다는 이유였습니다. 어느 미술대학에서는 고동색(古銅色)을 좋아하는 교수가 고동색을 사용하지 않는 제자의 그림은 아예 품평도 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영국에서 아카데미 선생이 보라색 사용을 금지 시키는 규칙에 반발하여 인물화가 토마스 게인스보로는 완전 보라색 코스츔을 입힌 인물화에 성공하여 아카데미를 너무나 놀라게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초록색은 화면 맨 앞에 칠해 놓으면 그림을 조화시키기가 참 어렵게 된다는 전통적 이론에 반대하기 위해 에두아르 마네는 강열하게 칠한 초록색 발코니 철난간을 맨 앞쪽 구도에 성공적으로 배치한 ‘발코니’를 발표해 동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동양에서도 남화의 수묵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북화의 채색화는 멸시한 것은 색채를 쓰면 그림이 자칫 치졸해진다는 이유였던 것인데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색채사용이 얼마나 까다로왔고 어렵웠었음을알 수 있습니다.

서툰 천연색 사진보다 흑백사진이 훨씬 깊은 맛을 느끼게하고, 그 흑백색은 더구나 각 사람마다의 기억으로 인해 오히려 본래의 물체색을 더 정확히 상상하게 합니다.

일본화를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그림으로 쳐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필요없이 과장되게 색채를 원색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유치하기만하고 높은 경지가 없는 세계라고 단정한 것 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일본화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신선한 쇽크를 주게 됐다는 놀라운 사실 입니다. 그 유치함과 더불어 서양화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독특한 구도로 구성된 일본 목판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려는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면서 그들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

수출품 찻잔이나 주전자의 포장종이로 천하게 사용된 목판화가 일단 쓰레기 통에 버려지면 상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파리의 화가들은 그 꾸겨진 일본 목판화 한장이라도 줏어서 집에 와 다림질 잘하여 벽에 붙혀 놓고는 너도 나도 일본풍을 좋아하는 현대화가가 됐다고 뽑낼 수 있었다니… 그러나 서양화가들에게 그렇게 우상처럼 받드려졌다고해서 우리가 생각해오던 고정관렴인 일본 목판화의 유치함이 거짓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서양화를 동양에서 제일 일찍 받아들인 일본의 미술학교와 미술연구소에서는 인상주의 화풍을 잘 해석해 냈을터인데도 색채사용에 있어서는 학생들에게 매우 억제된 수업을 시켰던 것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유학을 다녀 온 우리나라 선배화가들의 작품세계가 내내 어두운 화풍으로 일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리나라 선배화가들이 일본을 통한 서양화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로도 직접 유학을 떠 날 수 있었더라면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세계가 훨씬 일찍 밝아 졌으리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어쨋거나 나는 어렸을때 부터 밝은 색채를 매우 좋아하여 즐겨 사용했습니다.

1980년, 보스턴에 갔을 때 학교 미술반 출신으로 거기서 건축가가 된 선배와 동행해 미술관에 가서 뽈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를 오랜시간 감상하고 있을 때 그 선배가 우리나라의 색갈의 조화는 저 그림에서 처럼 보색관계로 사용된 초록색과 빨강색인 것 같애라고 했을때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그 형이 지적한 우리나라적 색채의 조화라는것은 절간의 단청에 칠해진 초록과 빨강색의 대비된 조화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요즘 인터넷으로 한국신문을 보다가 청계천 복원계획을 읽으며 나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습니다. 청계천하면 생각나는 게 많습니다.

나의 본적은 서울 중구 예관동인데 나는 쭉 그 근처의 을지로와 인현동에 살았고 퇴계로에 있는 일신국민학교에 입학해 다녔고, 피난을 미쳐못간6.25때는 방산시장이 있는 방산국민학교를 다니고 서울 수복 직후엔 학교에 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을지로 입구에 있는 청계국민학교에도 잠시 다녔습니다.

중학교때 부터는 화동에 있는 중고등학교 6년과 연건동에 있는 대학 4년을 합쳐 10년동안 청계천을 하루에도 몇번씩 건너가고 건너오며 걸어 다녔습니다. 수표교와 광교는 미술반때 야외사생을 나가 수도없이 그렸던 청계천의 다리 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청계천과 함께 자란 아이 였습니다.

장마때 폭우가 엄청 쏟아져 돼지가 청계천 다리밑으로 떠내려 가기도 하였는데, 찰랑찰랑해 넘칠 것 같은 무서운 물살을 보려고 겁도없이 물구경 나갔고 가뭄때 물이 줄어 실개천이 되는 계절엔 땡볕에 반짝이는 뜨거운 시세밭을 맨발로 뛰며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느라 잠자리채를 들고 개천바닥에 내려 갔습니다.

거기엔 까망 뺑기를 뚝뚝 흘리면서 ‘뱀’이라고 쓴 간판의 뱀장사가 뱀탕을 팔았고 까만색 뺑기로 ‘염색’ 이라고 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가마솥을 걸어 논 염색집이 있었습니다.

색채를 사용하면서 기억해 내고 즐거워 지곤 하는 사실이 나에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어머니는 가끔 뒷 곁에 무쇠솥을 걸어놓으시고 손수 물감을 들이셨는데 빨랫줄에서 출렁이는 물감들인 어머니의 천이고 또 하나는 청계천 다리밑 염색집 물감쟁이가 김이 무럭무럭나는 큰 가마솥에서 꺼내 장대에 받쳐진 축늘어진 긴줄에 내다 건, 바람에 펄렁거렸던 색색가지 천 입니다.

어머니의 천은 어디서 그런 색이 나왔올까 하도록 감탄스러운 초록색과 빨강색으로 물들여 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감쟁이의 넓다란 천도 어떻게 저렇게 파랗고 노랄까하도록 선명하게 물들여진 원색들의 잔치 였습니다. 그 찬란한 색들은 물에 젖었을 때와 마르고 있을 때와 아주 바싹 말랐을 때의 색갈이 시시 각각 달라 보였습니다.

그때 보았던 요술을 부렸던 색들이 나의 눈동자 망막의 뒷편에 각가지 색으로 물들여졌던 것이 아닐까요 ? 그렇게 내가 사용하고 있는 색갈들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머니의 색 이였고, 청계천 물감쟁이의 색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색들이 세월이 흐르며 세련됐다면 그것은 나의 그림속에서 시간과 함께 세련되었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전 미친듯이 파묻혀 있었던 나의 비구상화 세계에서도 그 때 당시로서는 색채가 매우 요란한 색들의 콤포지션 이였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많은 화려한 색을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파리에 도착해서 나를 제로로 놓고 그림그리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해서 구상세계로 돌아 갔을 때에도 나의 그 색채는 그대로 나를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언젠 부턴가 나의 큰 장기였을 자유스러운 색채의 무한한 사용이 나의 의도된 표현을 방해해 어지럽히고 있다고하는 사실로 고민하기 시작 했습니다.

나는 그 혼란함을 해결해 보려고 1975년 부터 6년간 색채를 버렸고 무채색만을 사용한 모노크롬한 화면과의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우회적인 과정을 거친 후에 나중에 다시 찾아지게 될 나의 색채사용이 과연 어떻게 변할껀가에 대해 나자신 궁금해 하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까지 삭임질했다고 생각한 나의 색채를1980년초부터 조금씩 다시 꺼내 조심스럽게 색채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나의 작업을 한참 들여다 본 어느 미술이론가가 ‘색과 선중에서 하나만을 빨리 선택해야 되겠다’라는 충고를 해주려 했습니다.

그 이론가는 아마도 서양화는 색(명암)이고 동양화는 선이지 않느냐를 빗댄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모르고 있읍니다만… 왜냐하면 그것을 그가 말한 것 처럼 딱 분리시켜서 존재시킬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의 의문을 품고 아직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번에는 절대적인 색의 가치찾기문제가 나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 명제는 마티스가 풀다가 후세화가들에게 풀라고 남긴 문제이기도 하였기에 기꺼이 이어 받고자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 문제풀기의 길은 결국, 단색의 나뭇잎들을 캔버스 상에 거리를 두며 배치하면서 독립된 서로간 색(잎)들간의 조화를 완벽하게 해보려는 일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열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이 됐고 자그마치 7년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의 작업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나의 재능이 이제는 끝났다고 인정해야 했습니다.

우여곡절의 나무잎 작품 시리즈 작업을 지난 여름 어느 날 마무리 짓기로 결심 하였고, 붓을 꺽고 글을 안쓰기로 한 문인과 같이 나도 붓을 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가히 놀기 시작하였는데 놀기 시작해 계속흐르는 그 시간은 나를 또하나의 지옥으로 내려보낸 시간이 됐습니다.

나는 붓을 다시 들기로 하였고 편한하 마음에서 파리에 도착했을때 한 것 처럼 크라식한 붓사용 기법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치 베토벤이 7번 교향곡을 쓰고 나서 모차르트 적인 편한한 8번 교향곡을 작곡했던 것을 흉내내는 것 처럼.

그렇게 탄생한 풍경화 두점을 보신 후 형께서 나한테 주시는 고멘트는 고마운 선물인양 당신은 칼라리스트이냐 였습니다.

저의 새로운 작품일에서도 이러한 관심을 계속 주시는 형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가을이 깊었습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까지 떨어트리면 나무들도 추운 겨울이 다시 왔다고 알리고 있어서 이지요 ?

가고 있는 가을을 또 아쉬워 하며, 안녕하시길 바라며.

Paris에서 2002년 11월 18일

파화 오천룡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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